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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까지 청와대가 결정…인사권 없는 장관 令이 서겠나"
2019/06/12  17:53:06  매일경제
◆ 무너지는 경제관료 ③ ◆ "1급 인사도 못할 정도로 인사권이 묵사발이 됐는데 장관의 영(令)이 설 리가 있겠습니까."(박병원 경총 명예회장)"이번 정권은 60만명 공무원을 정책의 머리가 아닌 손발로만 취급할 뿐이에요."(전직 금융위원장 A씨)문재인정부 들어 노골화되고 있는 '관료 패싱'에 전직 관료들은 '쓴소리'를 쏟아냈다. 최근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 간 관료 비하 발언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정부 관료, 특히 경제관료의 위상은 추락할 대로 추락한 상황이다. 청와대와 여당의 독주 때문에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정작 관련 부처들이 배제되는 것은 예삿일이다. 게다가 소득주도성장이나 탈원전과 같은 문재인정부 '도그마'를 방어하느라 2년 만에 그야말로 '영혼 없는 공무원'으로 전락한 게 공직사회의 현주소다. 무사안일, 복지부동과 같은 관료사회 폐해는 청와대와 여당이 자초한 결과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 靑 하수인 전락한 관료매일경제가 주요 경제부처 관료 1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문재인정부 들어 경제관료의 위상에 대해 응답자 68%가 '하락했다'고 답했다. 최근 현직에 있는 후배 관료들을 만났다는 A씨는 "이번 정권 들어 추락한 관료들의 위상과 자신의 처지에 자괴감이 크다고 하더라"며 "오히려 자조적으로 국가 미래에 대한 고민 없이 하라는 대로만 하니까 편하다는 말까지 하더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문재인정부 들어 유독 심해지고 있는 관료 폄하 분위기는 같은 진보 정권인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보다 더 혹독하다. 재정경제부 차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박병원 명예회장은 "김대중 정권은 경제위기 극복 때문에 경제관료를 우대했지만 야당 출신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경제관료를 권력에 붙어먹던 사람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박 회장은 "초기에 관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가장 강했던 게 노무현 정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집권 기간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는 등 실리주의 행보를 보이면서 역대 가장 경제관료를 우대했다는 게 박 회장의 평가다. 박 회장은 "노무현 정권의 주축이었던 현재 문재인정부 실세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변심에 경제관료들의 농간이 있었다고 생각해 관료에 부정적"이라고 말했다. 이런 '트라우마' 때문에 문재인정부 들어 관료들의 위상이 역대 어떤 정권보다도 추락했다는 것이다.

관료들의 추락한 위상은 국회에선 더 노골적이다. A씨는 "과거에는 당정협의는 정부가 안을 가져가고 여당은 의견을 제시하는 수준이었다"며 "적어도 큰 윤곽이 수정되는 일은 없었는데 지금은 이미 정해놓고 정부는 따르라고만 한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과거 정부에선 관료들이 결정해 온 정책을 국회는 서명만 하면 됐다"며 "여당 대표는 정부의 법안을 통과시키는 게 주된 업무일 만큼 관료들의 위상이 높았다"고 기억했다.

청와대가 모든 공직사회 인사권을 틀어쥐고 있는 현재 시스템에선 관료가 청와대의 '하수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많다. 박 회장은 "장관이 산하 기관장 인사는 물론 부처 1급 인사도 제대로 못하는 게 지금의 현실"이라며 "기관장들도 다 같이 청와대에서 임명받았다며 장관을 우습게 안다"고 말했다. 이어 박 회장은 "인사권이 묵사발이 됐기 때문에 장관의 영이 제대로 설 리가 없다"며 "지금은 국회와 청와대에 가서 줄이나 서는 게 장관 신세"라고 토로했다.

김동욱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한국행정학회장)는 "이번 정권은 장관에게 1급은커녕 국장 인사권도 안 준다고 한다"며 "청와대가 임명하는 자리만 수천 개에 달해 장관에게 인사권을 위임하면 금방 끝날 일을 몇 달씩 요식 행위인 공모 절차만 밟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 정책 프로세스 쇄신 필요전직 관료들은 행정부의 인사권 회복이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박근혜정부 행정부 인사를 책임졌던 이근면 전 인사혁신처장은 "청와대 수석들이 지금과 같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게 과연 맞는지 따져봐야 한다"며 "청와대의 인사권 전횡만 없었어도 블랙리스트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전 처장은 "정권에 독립적인 '인사원'과 같은 조직을 만들어 공직 인사를 도맡게 해야 한다"며 "정권에 상관없이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도 실질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현 정부의 '적폐 청산'은 관료사회에도 커다란 충격이다. 과거 정권 실세뿐만 아니라 정책 집행에 나섰던 관료들까지 모조리 타깃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A씨는 "과거에는 정책 결정과 집행 과정에서 부정행위만 없으면 관료들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며 "지금은 온통 적폐로 몰아붙이고 있어 관료사회를 크게 움츠러들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도 "과거 정권에서 옳았던 정책이 정권이 바뀌면 잘못이 되니 공무원들이 버텨낼 재간이 없다"며 "이 과정에서 감사원의 성과감사가 악용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도 정책감사를 하는 회계감사원(GAO)이 있지만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선에 그친다. 김 교수는 "권력은 마른 모래와 같기 때문에 움켜쥘수록 빠져나가 버린다"며 "지나치게 비대한 청와대 조직을 개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청와대 정책실은 장기적인 국가 성장 밑그림을 그리는 곳이지 지금처럼 정책 하나하나를 틀어쥐는 곳이 아니라는 목소리가 높다. 김 교수는 "정책실은 최소 10년 단위의 장기적인 국가 전략을 마련하는 곳이어야 하고 업무가 중복되는 안보실은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 주도의 당정협의와 청와대가 이끄는 당정청협의 구조에도 대대적 혁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A씨는 "정책 결정의 프로세스가 달라져야 한다"며 "당정협의나 당정청협의는 어디까지나 부처가 마련한 정책에 의견을 제시하는 자리여야 한다"고 말했다. A씨는 "청와대와 여당이 모든 정책을 주도하는 게 아니라 부처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회장은 "부처를 무기력하게 만들어놓으면 정권의 정책 실행에 오히려 문제가 생긴다"며 "정권이 관료사회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임성현 기자 / 최희석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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