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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부족함 메꾸기
2019/08/15  00:07:11  매일경제

'교육받지 않은 인도인이 공책을 내민다. 세계 수학계가 전전긍긍하는 난제의 완결된 답이 적혀 있다.' 인도 출신의 천재 라마누잔을 다룬 영화 '무한대를 본 남자'의 한 장면이다. 영화에서 제러미 아이언스는 차갑고 지적인 수학자 하디를 연기한다. 멋있었다.

얼마 전 다시 보게 된 영화는 느낌이 달랐다. 천재의 서사가 아니라, 각자 부족한 것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얘기였다. 상호 보완을 통해 지성사의 한 장을 만든 천재들이랄까.

유럽 수학자들에게 라마누잔은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증명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라마누잔은 얼굴 가득 곤혹감을 담아 대답한다. 힌두교의 여신 나마기리가 꿈속에서 자신의 혀에 답을 올려두고 갔다고.

그와 동시대에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다. 그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했을 테니까.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되지 못하면 그건 답이 아니니까. '질투심으로 당대 최고의 천재를 박해한 무리'에 끼지 않게 됐으니 가슴을 쓸어내릴 일이다.

라마누잔같이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 수학의 오랜 난제들을 해결한 것은 아직도 불가해하다. 하지만 정말 기적은, 그런 사람의 설명되지 않은 연구 결과를 현대 수학의 주류가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의 노트북은 마치 시인의 시집 같다. 미로로 가득한 그 노트를 현대 수학의 언어로 바꾸고 의심의 여지 없이 명징하게 논증하는 작업을 그의 친구들이 해준 때문이다.

그래서 벗이, 멘토가 인생을 바꾼다는 것 아닌가. 자신에겐 너무나 분명한데 무엇을 더 증명하라는 거냐며 라마누잔은 좌절한다. 하디는 밤을 새워서 라마누잔의 연구 결과를 현대 수학계가 받아들일 만한 수준의 논증을 곁들인 논문으로 만든다. 라마누잔 인생의 첫 논문은 이렇게 완성됐다. 게다가 공저가 아닌 라마누잔의 단독 논문이었다. 그렇게 공을 들인 논문조차도 자신의 아이디어가 아니니 공저가 아니라는, 하디의 학자적 결벽증 탓이다. 제자이자 친우의 아마도 잊힐 연구 결과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도와준 것만으로 하디는 지적 만족을 느꼈으려나. 친구도 별로 없고, 독신이며, 무신론자이고, 관계 결핍증 같은 걸 가진 하디에게는 치유의 경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에는 20세기 불세출의 인물들이 조연으로 나온다. 부푼 꿈을 안고 인도의 가족을 떠나서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대학에 도착한 라마누잔에게 한 교수가 인사를 건넨다. "병동에 온 걸 환영하네." 에고로 가득한, 뭔가의 결핍증에 걸린 환자들이 모인 곳이라는 뜻이었을까. 이 유머러스한 학자가 훗날 노벨 문학상을 받는 버트런드 러셀(종목홈)이다. 평탄한 수학 교수의 삶을 살지 못하고 반전 운동을 벌이면서 케임브리지에서 해임되더니, 왕성한 집필 활동을 통해 대철학자이자 대문호의 반열에 올랐다. 하디의 또 다른 평생의 친우였던 러셀은, 과정 없이 즉시 결론에 다다르는 라마누잔의 직관 능력을 꿰뚫어 보았다. 영화 속에서 그는 하디에게 말한다. '라마누잔의 영혼은 자유로우니 그에게 수학 강의를 듣게 하거나 증명을 하라고 강요하지 말게.'영화에서는 머리가 큰 사람이 한 명 나온다. 하디의 절친인 존 리틀우드다. 라마누잔이 떠난 후에, 리틀우드와 하디는 잠시 경험한 '천상의 세계'를 떠나 인간의 세계에서 지적 협력을 정력적으로 진행했다. 라마누잔의 영향을 받은 협력 연구의 파생 효과는 아직 진행 중이다. 2010년에 히브리대학의 엘론 린덴스트라우스 교수가 수학 분야의 최고 상인 필즈 메달을 수상했다. 그의 수상 사유 설명에 리틀우드-하디 예상을 부분적으로 해결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20세기 초의 케임브리지 교정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각자의 천재성을 넘은 신뢰의 관계를 통해서 21세기까지 영향을 미치는 영화 밖 영화 같은 장면이다.

우리는 각자의 부족함과 아픔을 갖고 산다. 라마누잔의 경우처럼, 자력으로 부족함을 메꾸는 게 불가능에 가까울 경우도 있다. 서로의 부족함을 메꾸는 벗과 멘토가 우리가 다다를 수 있는 한계를 확장해주는 것 아닐까.

[박형주 아주대 총장][ⓒ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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