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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서 포착한 감정적 격랑, 한국영화의 역사로
2019/10/05  20:29:45  아시아경제

[이미지출처=연합뉴스]


분단에서 비롯된 아픔과 이념 갈등, 가족 해체. 정일성(90) 촬영감독에게는 동력을 제공한 원천이다. 격렬한 역사 변동을 겪으며 느낀 희로애락을 영상에 투영했다. '지하실의 7인', '화녀', '충녀', '파계', '바보들의 행진', '이어도', '만다라', '만추', '장군의 아들', '태백산맥', '춘향뎐', '취화선', '하류인생' 등 영화 138편이다. 촬영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려 미학적 촬영의 선구자로 불린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올해 신설한 한국영화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정 감독을 선정했다. 그는 4일 기자회견에서 "개인적으로 영광이다. 앞으로 좋은 촬영감독들에게 보다 많은 회고전 기회가 돌아가길 바란다"며 웃었다. 정 감독의 영상은 사실적이고 아름답다. 해방과 분단, 전쟁, 쿠데타, 군사 독재, 민주화 항쟁 등을 겪으며 떠올린 생각과 감정적 격랑을 포착해 긴장과 공감을 동시에 부여한다. 때로는 따스한 기운을 덧칠해 작은 용기와 희망을 전한다. 근현대사의 재조명이자 한국영화의 살아있는 역사다.


그는 "긴장하며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를 통과하며 영화인으로서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 지를 많이 생각했다"고 했다. "오랫동안 영화를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불행한 근현대사 때문"이라며 "고통과 기쁨, 슬픔을 같이 나눴던 우리 세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정 감독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태어났다. 열일곱 살에 한국으로 건너와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미 공보원에서 공군 홍보영화를 접하고 촬영감독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최고 촬영감독으로 꼽히던 김학성 감독 밑에서 조수 생활을 하다가 20대 후반에 '지상의 비극'으로 데뷔했다. 그는 홍콩영화 아류작을 찍는데 그친 국내 현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일본으로 떠났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붉은 수염' 등에 촬영팀으로 합류해 영상 기법을 공부, 독창적인 스타일을 구축했다.


정 감독이 카메라로 표현한 미학은 다채롭기 그지없다. 화녀는 파격적인 앵글과 색채 미학이 일품이다. '최후의 증인'은 4계절을 담기 위해 1년 이상 촬영한 고집이 돋보인다. 사회의 공기와 인물의 다변화하는 심리를 잡아내는 재주는 30년 이상 호흡을 맞춘 임권택 감독과 작품들에서 두드러진다. '신궁', 만다라, '서편제', 취화선, '천년학' 등이다. 정 감독은 "동시대 사회나 역사, 미래에 대한 생각들이 비슷해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면서도 "너무 오랫동안 일해 매너리즘에 빠지면 서로에게 독이 될 수 있다고 함께 생각한 시기에 헤어졌다"고 했다.


그는 "저는 원칙주의자다. 형식, 리얼리즘, 모더니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무엇보다 격조를 가장 신경 쓴다. 이것이야말로 영화감독이 아니라 촬영감독이 만드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리얼리즘의 경우 흔히 있는 그대로 찍는 것으로 아는데, 그 속에서도 꿈이 있어야 한다. 꿈이 없다면 한낱 뉴스나 기록영화와 다름없다. 모더니즘은 일종의 '포즈(pause·멈춤)'다. 영화가 계속 긴장의 연속이거나 사실주의만을 추종하다 보면 재미가 없다. 한 박자 쉬어갈 필요가 있다. 엄청나게 재밌는 대사 앞이나 두려운 장면 앞에 포즈를 둬야 더 재밌고 두렵게 느껴진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정 감독은 대표작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138편 가운데 40~50편은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영화들"이라고 했다. "젊고 철없을 때는 흥행작이나 수상작을 대표작으로 뽑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부끄럽게 생각했던 그 40~50편이 교과서처럼 저를 지배한다"며 "열심히 찍어서 모든 사람이 인정한 작품보다는 실패한 영화가 제게는 좋은 교과서가 된 것 같다"고 했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는 4·19와 5·16을 언급했다. "당시 영화계는 침체기였다"며 "제가 찍었든, 안 찍었든 그 시기에 신상옥 감독의 몇몇 영화나 이만희 감독 만추, 김수용 감독의 '산불' 같은 명작이 나왔다는 게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어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한 힘의 원천 가운데 1/3은 함께 작업한 감독들이다. 다른 1/3은 1년에서 6개월 이상 떠돌이 생활을 한 남편을 대신해 홀로 지켜준 아내, 나머지 1/3은 제 능력이다"라고 했다. 특히 고마운 연출자로는 김수용 감독과 임권택 감독을 떠올렸다. "1979년 교통사고가 나서 대수술을 했을 때 저를 일으켜 세운 분이 김수용 감독이다. 1980년 암에 걸려 병원에 있을 때는 임권택 감독이 일으켜줬다"며 "그분들에게 진 빚을 아직 다 갚지 못했다"고 했다.


이번 회고전은 화녀를 비롯해 '사람의 아들', 최후의 증인, 만다라, 만추, '황진이', '본 투 킬' 등 일곱 편을 상영한다. 정 감독은 "제가 작품을 정하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작품도 있다"면서 "제 영화라고 해서 다 좋으라는 법은 없다. 그렇게 빛을 보지 못한 작품들을 통해서도 저의 참모습을 보실 수 있지 않다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과거 했던 영화들을 다시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모르는 젊은 감독이 어느 날 느닷없이 '같이 영화를 하자'고 제안해주면 좋겠다"며 "그렇게 길이 없는 들판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부산=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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