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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당한 여인, 박차고 나온 여인[이수연의 아트버스]<12>
2022/07/08  00:01:00  이데일리
- ▲존 싱어 사전트 & 마리 드니즈 빌레르 '초상화의 목소리'
- 상류사회 美기준 충족 사전트 '마담 X'
- 여인이 자신의 목소리 낼까 두려웠나
- 초상화 내걸리자 프랑스 문화계 혹평
- 내 목소리 내고픈 여인, 빌레르 '도녜'
- 관람자 정면 응시한 '여인의 눈빛'으로

존 싱어 사전트의 ‘마담 X의 초상’(1884). 심미주의적 아름다움을 발산한 사전트의 대표작. 파리 최고의 초상화가를 꿈꾸던 그가 화제를 불러일으킬 대상을 물색하던 중 같은 미국인으로 프랑스 은행가의 아내였던, 당대 사교계 최고 미인 버지니 고트로에게 먼저 제안하고 설득해 완성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차례 구성을 변경하고 마침내 고트로의 특징적인 옆모습을 강조하는 자세로 결정했다. 파리 살롱전에 출품해 선정성을 이유로 맹비난을 받을 당시, 드레스 한쪽 어깨끈이 내려가 있던 것을 전시 이후 수정해 다시 그렸다. 캔버스에 유채, 208.6×109.9㎝,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까마득히 오래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그린 동굴벽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예술의 기원’이란 것을 말입니다. 문자를 대신한 소통이 예술의 목적, 그 전부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내 예술은, 또 미술은 다른 날개를 달기 시작했습니다. 종교를 달고, 휴머니즘을 달고, 상상력을 달았습니다. 20세기쯤 오자 미래를 내다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과학과 기술을 딛고 서서 인간의 꿈이 도달할 그 너머를 꿈꿨던 겁니다. 이제 현대미술은 영역의 한계를 두지 않습니다. NFT에다가 메타버스에까지 닿아 있지 않습니까. 오랜시간 현대미술의 진격을 지켜봐온 이수연 학예연구사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지점 그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과학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비로소 가능했던, 예술의 창조적인 경계의 확장을 가져온 미술거장의 삶과 작품 읽기를 통해 예술로 꾸는 꿈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그 드넓은 ‘아트버스’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 주>


[이수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사자가 글 쓰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 세상 모든 역사는 사냥꾼의 영웅서사를 쓸 것이다.” 2007년 부커상을 수상한 아프리카 작가 치누아 아체베의 소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1958)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이 소설은 오콩코란 주인공의 삶을 통해 부족의 전통문화가 서구제국과 기독교문화와 만났던 상황을 나이지리아인의 시선에서 나이지리아인의 생각을 쓴 반식민주의 작품이다.

아체베는 당대 영문학이 백인이란 타인의 시선에서 아프리카를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소설을 썼다. 18세기 산업혁명과 19세기 과학혁명의 길목에서 시대의 흐름을 놓쳤던 비유럽 국가들은 글을 쓰지 못하는 사자와 같이 자신을 표현할 힘과 방법을 잃어버렸고, 오랫동안 아프리카 대륙은 자신의 입장을 내놓지 못하고 침묵의 잠에 빠져들었다. 아체베 등 아프리카 작가들이 비로소 ‘소설’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쓸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문명발전 속도 따라잡으려 안간힘 쓰던 여성들

근대문화의 발전으로 도태되고 소외된 사자는 비단 아프리카 사람뿐만이 아니다. 힘의 약세에도 불구하고 문명발전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유럽의 또 다른 사자가 있었으니 ‘여성’이다. 그렇다고 모든 여성이 마냥 억압받고 착취를 당했던 것만은 아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성공적으로 사교계에 데뷔하고 결혼한 뒤 아이를 잘 키워내면, 일정한 위치를 점하고 화려한 삶을 살 수 있었다.

미국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활동한 화가 존 싱어 사전트(1856∼1925)의 ‘마담 X의 초상’(1884)에는 ‘성공한’ 여성이 나온다. 마담 X는 젊음과 아름다움으로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여인이다. 하얀 피부와 늘씬하면서도 모래시계 같은 볼륨있는 몸매로 뭇 남성을 사로잡았던 그녀는 공공연히 수많은 연인을 뒀고, 종내에는 부유한 프랑스 은행가와 결혼했다. 그림은 그녀가 결혼한 후에 그려졌다.

당시 촉망받던 젊은 초상화가였던 사전트는 모델의 매력을 발산하는 걸작을 완성했다는 자부심으로 이 초상화를 파리 살롱전에 냈으나 작품은 비평가와 세간의 혹독한 평가를 받으며 모델과 작가 모두에게 치명적인 스캔들이 돼버리고 만다. 결국 비난을 견디다 못한 그녀의 시어머니는 전시에서 작품을 내려달라고 작가에게 요구하기도 했다니 말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녀의 아름다움이 파리 사교계에선 동경의 대상이었으나 막상 그 장면을 박제하듯 전시회에 걸자 모든 이들이 그토록 불편해했다는 것이.

마담 X, 아름다움은 충족했으나 목소리가 없어

‘마담 X의 초상’ 속 여인은 당시 상류사회의 여인들이 추구하던 아름다움의 기준을 충족한다. 희고 창백한 피부, 우아한 목선과 도드라진 이마, 잘록한 허리, 장및빛 뺨과 입술 등. 무엇보다 의도한 듯 의도하지 않은 듯한 요염한 자태가 눈에 띈다. 살짝 고개를 돌린 덕분에 목에서 가슴까지 죽 뻗은 선은 검은 드레스와 금빛 어깨끈의 대조 속에 더욱 눈에 띈다. 천박하지 않은, 오히려 고상한 이 섹스 어필은 딱 상류사회 여성이 추구하는 정도의 매력이었을 것이다. 그림의 배경 또한 인물의 우아함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어두운 벽지를 뒤로 한 채 고급스러운 원목가구에 기대어 선 그녀는 절정의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다.

그럼에도 작품에는 뭔가 빠진 것이 있다. 마담 X의 시선이다.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하지만 거기가 어딘지는 정확하지 않다. 애초에 시선 설정은 긴 목선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으니 사실 그녀가 어디를 보든 아무 상관은 없다. 그저 젊고 야망에 가득찼던 화가의 시선과 파리 사교계가 사랑하던 아름다움을 향한 기준, 이것이 전부다. 아름다운 갈기와 황금빛 털을 박제당한 사자에게는 목소리가 필요 없다. 박제돼 서서히 잊혀야 할 사자의 초상화가 파리 살롱전에 떠들썩하게 등장했을 때 온 프랑스 문화계가 혹평했던 이유는 혹여라도 그녀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목소리를 낼까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물론 마담 X는 스캔들을 뒤로 한 채 우아한 부인으로만 살다 갔지만 말이다.

반면 마담 X가 등장하기 80여년 전 이미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었던 여인도 있었다. 프랑스 화가 마리 드니즈 빌레르(1774∼1821)는 ‘마리 조세핀 샤를로트 뒤 발 도녜’(1801)란 그림에서 자신의 손으로 펜을 쥐고 자신의 눈으로 본 세상을 그리려는 젊은 여성을 담았다. 이 작품의 배경 또한 꽤 고급스럽다. 후대의 연구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 방은 루브르의 한 갤러리라고 하니, 이 여인의 사회적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마리 드니즈 빌레르의 ‘마리 조세핀 샤를로트 뒤 발 도녜’(1801). 여성이 화가로 활동하기 어려웠던 시절, 건축가 지망생 남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빌레르가 남긴 초상화 중 한 점이다. 200년 남짓 거장 자크 루이 다비드에게 내줬던 화가의 이름은 1996년 되찾았다. 작품에서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보는 이를 응시하는 여인은 샤를로트 뒤 발 도녜(1786~1868). 당시 여성 미술학도들이 아틀리에로 삼았던 루브르의 한 갤러리를 배경으로, 동료이자 같은 학생이던 도녜를 모델로 그렸다는 것도 그때 밝혀졌다. 캔버스에 유채, 161.3×128.6㎝,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그림 속 여인도 마담 X 못지않게 젊고 아름답다. 부드러운 흰색 실크드레스에 분홍색 허리끈을 맨 여인은 전면을 향해 반쯤 몸을 튼 채 한 손은 화판을 잡고 한 손은 펜을 쥐고 있다. 뒤편 창문에서 넘어온 햇살은 고슬고슬하고 앳된 금발과 동그란 얼굴, 하얀 피부를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여인이 앉은 의자의 등받이는 붉은 천으로 덮여 있는데, 본래 유럽초상화의 유구한 전통에서 붉은 배경은 고귀한 인물을 표현하며, 몽상적이고 지적인 활동을 상징해왔다. 언뜻 전형적인 상류층 여성의 아름다운 초상화 구도와 색감을 차용한 작품은 대상을 수동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뭔가 하고자 노력하는 여인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담았다는 점에서 여타 그림과 차별적이다.

빌레르의 초상화, 한때 남성작가 작품으로 오인

또 다른 특별한 점은 여인이 드물게 관람자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통상 유럽회화의 전통에서 정면을 응시하는 초상은 왕이나 귀족, 혹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하지만 이 여인의 진지한 눈빛은 그녀가 현재 지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햇빛에 반짝이는 머리카락과 대조적으로 그늘진 얼굴에서 빛나는 눈동자는 과연 그녀가 무엇을 고민하고 말하려는지 함께 고민하도록 하는 힘이 있다.

그녀는 무엇을 그릴지 고민하고 있다. 무엇을 그릴지 결정하는 것은 그녀의 마음이며, 어떻게 그릴지 결정하는 것 또한 그녀의 선택이다. 무엇보다 여인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만한 그림교육과 어학·문학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배운 것을 넘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고자 하는 젊은 작가의 총기 어린 눈빛 앞에 깨진 창 너머로 흘긋 보이는 사랑의 유희나 사교계의 허명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무기력해 보인다.

이 독특하고 강렬한 초상화가 한때 남성작가의 작품으로 오인됐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본래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기증됐을 때는 18세기 프랑스 신고전주의 거장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의 작품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미술관의 지속적인 연구에 의해 빌레르의 이름이 밝혀지게 되었다. 작가와 모델, 두 여성이 서로를 마주보며 그림을 그리는 장면은 미술사 전체를 통틀어 상당히 희귀하다. 인생의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젊은 여성작가들은 새로운 세계를 함께 창조하며 무슨 꿈을 꾸었을까. 실제로 그림 속 주인공은 빌레르와 같은 직업 예술가가 되기를 원했으나 결혼으로 그 꿈을 이루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고 노력하던 그 진지한 모습은 또 다른 여성작가에 의해 그려져 잊히지 않는 그녀만의 목소리가 돼 남았다.

△이수연 학예연구사는…

1979년 생. ‘문자보다 이미지’였다. 이미지의 가능성, 이미지를 읽어내는 방식에 자꾸 관심이 갔다.서울대 언어학과를 졸업한 뒤 방향을 틀었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백남준 퍼포먼스 연구’란 결과물을 만들었다. 이후 미술전문기획사 사무소(SAMUSO) 등을 거쳐 2008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하면서 전문영역이 선명해졌다. 무빙이미지·영화·인터넷 등 미디어기술의 발전이 미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고든 일이다. 내친김에 미국 코넬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해 미디어기술을 입은 시각문화가 끝없이 진화하는 현장을 학술연구와 연결하는 일에까지 욕심을 냈다. 백남준 탄생 90주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올 가을에 열 ‘백남준 효과’ 전 준비에 여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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