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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지도책 보는 사람이 100년을 끌고 간다"

2020/01/10 01:43:02아시아경제

[이미지출처=연합뉴스]


한여름 일을 마치고 귀가한 아버지가 덥다며 문을 열라고 한다. 어머니는 모기가 들어오니 문을 닫으라고 한다. 어느 쪽 말을 듣더라도 집안의 평화가 깨질 수 있는 상황. 똑똑하게 잘 가르친 자식이라면 문에 방충망을 설치한다. 모기를 막으면서 바람이 들어오게 해 분란을 모면한다.


이어령(86) 전 문화부 장관이 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광화문문화포럼 특별강연 ‘신지정학으로 본 한반도의 미래’에서 들려준 이야기다. 그는 “이것이 바로 창조”라며 “쉬운 일이 아닌 걸 하는 게 창조고, 쉬운 걸 하는 게 선택”이라고 밝혔다.


창조와 선택 사이에 놓인 자식은 우리나라다. 이 전 장관은 “호주머니, 호궁, 호복, 호떡처럼 호(胡)가 붙은 건 유라시아 대륙을 거쳐 들어온 반면 양복, 양말, 양궁처럼 양(洋)이 붙은 건 거꾸로 서쪽으로 한 바퀴 돌아 태평양 바다를 건너서 왔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의 정체성은 대륙 세력이 보면 극동이지만, 배를 타고 온 해양 세력이 보면 극서고, 극동과 극서가 만난 자리가 바로 DMZ(비무장지대), 이 현장”이라고 설명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그는 “현재 우리가 겪는 진통은 바다도, 대륙도 아닌 반도의 운명”이라고 했다. “발칸반도를 비롯한 반도는 대륙이 되거나 바다가 되어야 사는데, 반도로 남아 있으면 반드시 양 세력 어느 한쪽으로부터 피해를 받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다. 모든 반도의 운명이 너는 바다냐 대륙이냐 물을 때 잘못 답하거나 줄을 잘 못 서면 죽게 된다”고 강조했다.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지만 역사와 현 정세에 비추어 보면 대륙 세력은 중국과 러시아, 해양(바다) 세력은 미국과 일본으로 풀이된다.


이 전 장관이 생각하는 우리나라는 창조보다 선택하기 바빴던 나라다. 그는 “내가 원하는 역사를 만든 게 아니라 남이 줘놓고 ‘너 어디 가질래’하면 눈치를 봐서 ‘어디 줄을 서면 되겠구나’ 했기 때문에 내가 살고 싶은 역사, 살고 싶은 땅을 만들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지정학적 특성상 양 세력의 격전장이 된 국면에서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해 일제 강점과 분단이라는 고난을 피할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이 전 장관은 “제가 자꾸 창조라는 말을 하는데, 한이 맺힌 것 같다. 반도가 살 수 있는 길은 분명히 있다”라고 밝혔다. 그는 “지금은 구한말 때나 해방 직후랑 똑같다. 달력이 아니라 지도책을 보는 사람이 앞으로 100년을 끌고 갈 것”이라며 우리가 원하는 평화와 번영의 역사를 쓰려면 무엇보다 지정학적 통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이 전 장관은 첫 문화예술인 출신 장관이다. 노태우 정부 시절 문화공보부에서 공보처가 분리되고 ‘문화부’가 신설되자 초대장관으로 취임해 2년간 장관직을 수행했다. 문학평론, 소설, 수필을 쓴 문필가이자 대학교수로도 활동했다. 일간지 논설위원 등을 지낸 언론인이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기도 하다. 이날 광화문문화포럼에서 창립 20주년을 맞아 제정한 ‘광화문문화예술상’ 초대 수상자로 선정돼 상을 받았다. 광화문문화포럼은 예술인, 학자, 법조인, 언론인, 의료인, 기업인 등이 참여하는 문화예술 모임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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