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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격 달인’ 장효조는 홈런타자였다 [기록을 남긴 선수 기억에 남는 선수]

2020/03/30 13:46:45파이낸셜뉴스
공을 기다리고 있는 장효조. 눈이 솔방울처럼 커져 있다. /사진=fnDB

그는 20분이나 늦게 나타났다. 1987년 연말 서울역 광장은 추웠다. 밖에서 언 몸이 되어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는데 허겁지겁 그가 달려왔다. 택시에서 막 내렸다고 했다. 기차 시간이 거의 임박해서다. 간신히 인터뷰 약속을 잡아 두었는데.

어쩔 수 없이 함께 기차에 올라탔다. 서울발 동대구행 새마을 열차였다. 식당칸에 자리를 잡고 맥주를 시켰다. 그는 야구 외에 맥주와 골프, 재즈를 좋아했다. 그렇게 해서 3시간여에 걸친 취중 인터뷰가 진행됐다.

어린 시절부터 그날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소회까지 그는 마음을 열고 진솔하게 자신을 드러냈다. 그날 삼성 구단은 장효조(1956~2011년)의 트레이드를 발표했다. 이 트레이드는 곧 철회되었지만 이듬해 12월 기어이 단행됐다.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를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가 어떻게 야구를 해왔는데.’ 그런 자부심이 자신의 뜻이 아닌 구단의 결정으로 인한 타팀 이적을 못내 수용하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야구를 해왔기에. 그의 얘기는 3시간으로도 모자라 대구 도착 후 맥주 집으로까지 이어졌다.

장효조는 중학교(대구중) 시절 재수를 했다. 당시 야구부엔 흔히 있던 일이었다. 남들보다 1년 늦게 상원고(당시 대구상고)에 입학했다. 장효조는 1학년 때 대통령배를 비롯한 각종 대회서 2번이나 타격왕을 차지했다. 통산 타율이 무려 4할7푼5리.

당시 강태정 감독은 장효조의 월반을 허락했다. 한국 야구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월반이었다. 장효조는 2학년을 거치지 않고 바로 3학년으로 올라갔다. 등번호 10번, 장훈과 장효조의 번호였다. 장효조는 한양대 총장을 직접 만난 자리서 진로를 결정했다. 파격적인 조건(누나의 취업과 전세 아파트)으로 입학했다.

장효조는 대학 4년 내내 4할대 타율을 기록했다. 가장 뛰어난 타율은 4할5푼9리(159타수 73안타). 대학 2학년 때였다. 스스로도 “그 무렵 인생 최고의 타격감을 유지했다”고 말했다. 본인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은 믿기지 않는 증언.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는 공의 실밥을 보고 때린 적이 있다고 밝혔다. 나는 솔직히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대학 2학년 때 야구공에 찍힌 둥근 원을 본 적은 두어 차례 있었다. 그 안에 적힌 ‘대한야구협회 공인구’라는 글씨는 보지 못했지만.”
잠깐, 뭐라고요? 야구공이 아니라 겉면에 찍힌 둥근 마크를 봤다고요? 취중이지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이 사람이 지금 농담을 하나. 당신이 대단한 타자인 건 알지만 설마. 여러 번 그에게 되물었다. 취중이라고 막말인가. 장효조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래, 사실이라고 믿자.

장효조는 1979년 실업야구 포항제철에 입단했다. 계약에 앞서 그는 박태준 당시 포철 회장을 직접 만났다. “무엇을 원하나?” 박 회장의 질문에 당돌하게 “서울에서 살 아파트가 필요합니다. 잠실 쯤이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박 회장은 장효조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이듬해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장효조는 두 경기 연속 3점 홈런으로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우승은 아마야구 최강 쿠바. 최동원(연세대), 김시진(한양대), 김재박(성무), 김용희(포철) 등이 주축이었다. 이듬해 장효조는 성무(공군)에 입대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입대 전날 사단이 났다. 친구들과 한 잔 걸치고 돌아온 장효조는 집 앞에 대기 중인 군용 지프를 발견했다. <계속>

texan509@fnnews.com 성일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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